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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부력 (2018~ )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깨달은 것은, 세상과의 관계 맺기가 가능한 본질적인 이유였다. 그것은 개개인의 총집합이 사회가 된다는 것이었고,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것이었다.

 

너무 당연해서 등한시했던 근원적인 사실을 머리와 가슴으로 인지한 순간, 오랜 시간동안의 작업이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관계 맺기가 주는 다양한 감정들이 왜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 깨달게 된 것이다. 나는 비로소 이 실체없는 감정의 덩어리를 껴안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리네가 쌓아 올리고 있는 탑을 바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공기주머니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공기와도 같아서 언제든지 허물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인간관계의 물리적인 거리감을 시각적으로 측정하고 기록하고자 하였다.

이 작업은 세상과 관계 맺어 나가며 변화하는 나 자신의 자화상이 될 수도, 누군가의 초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거칠게 떠도는 감정들이라는 돌이 한데 모여 마모되고, 언젠가는 반짝이게 될 날들을 기대해본다.

Buoyancy of Emotion

What I realized in the flow of time was an essential reason to be able to make a relationship with the world. It was that the collective collective of individuals was society, and I was 'I' and you were 'you'.

 

 

It was the moment when I recognized the fundamental fact that I had naturally neglected with my head and my heart, and the long time work was changed. I realized why the various emotions given by relationships are inevitable.

 

I think there is an invisible air bag between man and man. It is literally like air, and it may or may not be broken at any time. I wanted to visually measure and record the physical distance of human relationships.

 

 

This work may be a portrait of someone who is becoming a relationship with the world, a self-portrait that changes, or someone.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1. 김유나의 사진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종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그것은 남녀 또는 동성 간의 혹은 여러 사람들 간의 다층적인 상황성을 암시하는 장면을 통해 펼쳐진다. 풍경 안에 자리한 둘 혹은 세 명 이상의 인간들은 서로 마주보거나 등을 지고 있거나 함께 동일한 방향을 응시 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는 둘 사이를 간섭하는 매개들, 완강한 방해물이나 혹은 나름의 완충작용을 하는 오브제들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간극, 이른바 크레바스(빙하의 틈) 혹은 깊은 심연과도 같은 것이 가로질러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온전히 덮거나 없는 것으로 넘어갈 도리는 없다.

김유나는 자신의 작품 제목을 <감정의 부력>이라고 명명했다. 부력이란 유체가 유체에 잠긴 물체를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밀어내는 힘을 말한다. 인간의 감정은 다른 인간과의 교류로 인해 파생되고 그 존재가 내 안에 들어와 나의 감정의 영역에 들어와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상태에서 연유한다. 들어오고 밀려난 것들 간의 관계를 작가는 은유적으로 <감정의 부력>이라고 칭한 듯 싶다. 하여간 김유나의 작업은 본인이 삶을, 타인과 연루된 삶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와 즉각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김유나의 사진은 일종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에 해당하는 편이다. 피사체인 인물들은 특정한 상황을 연기하고 있다. 둘 혹은 셋은 자연 풍경 안에서 오브제를 활용해 자신들의 심리적 거리와 간극을 상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모호하고 내밀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심리적인 착잡함을, 나아가 둘 만의 관계로 이내 형성된 긴장감이나 강렬한 감정적인 교류나 어떤 애매함을 저 오브제들은 대리한다. 대리하고자 한다.

여기서 사진은 몇 겹의 장치로 포개져 있다. 우선 이 감정적이고 사연 많은, 유한한 인간들과는 무관해 보이는 자연이 뒤로 물러나 있거나 주변을 채우고 있다. 자연은 항상 불변하듯이 그 자리에 영원처럼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은 너무 무심해보여 그곳에 있는 인간들 간의 소소한 감정과 심리적 갈등이나 내면의 드라마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을 뿐이다. 결국은 사라지고 없어질 유한한 존재들의 이 일시적인 상황, 사건을 그저 방치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할 문제다.

동시에 그 자연은 너무 아름다워서-인간의 눈에는-저 웅장하고 장엄하며 불변하는 자연 앞에서의 인간사가 하등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되묻게 하는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산수화나 풍경화의 본래적 의미를 고찰하게 해준다. 동양의 산수화는 영원한 자연 속에 유한한 인간의 소소한 물리적, 심리적 자리를 지시한다. 서구의 경우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에서 처음으로 자연경관이 자립화되어 나타났다. 루위스달, 호베마 등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들은 스피노자, 데카르트, 뉴턴과 동시대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우선적으로 구름과 햇빛을 교차시켜 풍부하고 다양한 표정의 하늘을 포착하였다. 그런데 이 그림은 실상‘하늘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주제다. 그러니까 공간의 무한성을 아득한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주체의 심정이 바로 그림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네덜란드 풍경화가들이 그린 이‘무한성에 사로잡힌 공간’은 곧 유한성이 끝나는 지점에 놓여있는 시선이자 이른바 죽음의 시선이며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의 자리에 미리 가 있는, 유령이 된 나 자신의 시선’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유한성에 대산 통렬한 자각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는 얘기다.

2. 다시 김유나의 사진으로 돌아와 보면 무표정한 두 인간이 서로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몸짓, 그리고 둘 사이를 연결/차단하고 있는 구조물 사이에 걸쳐있다. 둘 사이의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상당히 절제된 상태에서 전달하는 사진이다. 그것은 마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의 퍼포먼스를 엄청 순화시켜서 스틸 사진으로, 아름답게 보여주는 편이다. 일정한 시기동안 그 둘이 행한 작업은 남녀사이의, 인간 사이의 ‘삶과 감정이 부서지기 쉬운 것이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신뢰와 고통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탐구한 진지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사실 우리는 관계를 맺는 순간 상처를 받거나 상처를 주기 시작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인다.”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결국 모든 문제가 파생된다. 그러나 관계 맺기가 없다면 삶은 없다는 점에서 이는 또한 아이러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이 거리를 통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스스로 방어벽 같은 것을 자기 내부에,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두르고 있겠지만 그것이 온전한 구실을 해준다고 보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수시로 무너지고 세워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공기주머니가 있다고 생각한다...나는 인간관계의 물리적인 거리감을 시각적으로 측정하고 기록하고자 하였다.“(작가노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란 물리적, 심리적 거리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타인에 대해 우리는 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모종의 불안과 공포, 두려움, 경계심을 작동시키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친근한 존재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거리감이란 것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사소한 일로, 혹은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일로 거리감이 생기고 낯설어지고 다시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인간과 인간의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리적, 정신적, 육체적 거리의 문제로 환원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거리의 유지와 설정, 차단, 단절 등등이 결국 인간의 삶의 여러 내용을 만들고 감정을 기술하는 셈이다. 작가는 바로 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사진 매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결코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공간이라 특별히 기술하거나 언급될 수 없는, 그래서 표현의 불가능성의 영역에서 안타깝게 맴도는 그 거리라고 하는 공간, 분위기, 느낌, 그러니까 분명한 실체를 지닌 것 같으면서도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 무척이나 애매한 것을 가시화하려는 지난한 시도를 사진이란 분명한 재현의 도구에 의탁한다. 이때 둘 사이의 거리라는 추상적이며 비가시적 영역의 것들은 나무기둥, 베일, 커튼, 바위, 고무공, 훌라후프 등이 매개가 되어 틈/연결고리를 만들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잇대어 있다. 이런 오브제/매개물에 의지해 이 두 사람은 연결되고 아직은 둘의 관계를 도모하거나 분리되는 것을 막고 있다. 인간이란 사실 완벽한 개체이고 완벽히 고립된 존재물이다.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온전히 밀봉된 고독한 생명체는 세계와 단호히 분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역시 나와 동일한 완벽한 개체, 고립된 존재를 욕망하고 관계 맺기를 꿈꾼다. 그 절대적 타자와 하나가 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아와 타자간의 관계설정이란 문제는 매우 지난한 문제이자 오랜 과제이다. 인간의 삶과 역사는, 미술은 이 지나칠 정도로 진부하지만 여전히 너무 날카롭고 피해나갈 수 없는 현재적 문제 앞에서 인류 전체의 지난 역사를 디시 반복하면서 저 낯선 타자와의 관계를, 거리를 절망적으로 어느 순간은 희망적으로 조율한다.

김유나의 사진은 그 거리에 관한 사진적 기록이다. 나로서는 이 주제보다 사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물가에 놓인 바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등을 보여주고 있는 사진, 또는 조감의 시선으로 포착한 아름다운 풍경 속에 갈라진 물길과 그로인해 양편에 따로 서 있는 남녀의 모습을 작게 보여주는 일련의 사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고 낭만적이며 서정성이 충만한 이 사진은 건조한 개념으로만 연출되는 사진의 턱을 매끄럽게 넘고 있는 어느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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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부력 08, 100cm×86cm, pigment print,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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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oyancy of Emotion 07, 120cm×102cm, pig
Buoyancy of Emotion 09, 100cm×86cm, pigm
small_감정의 부력12, 100x86cm, print on fabric, 2021.jpf
small_감정의 부력13, 100x86cm, print on fabric, 2021.jp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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